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녹산의 난 (문단 편집) ==== 영무: 군대의 재건 ==== 756년 7월, '''영무에서 당숙종이 제위에 올랐을 당시 당의 중앙군은 사실상 소멸한 상태였다.''' 이에 당숙종은 필사적으로 군을 끌어모았으며, 곽자의, 이광필이 8월에 삭방군진의 5만여 병력을 이끌고 옴으로써 겨우겨우 군대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고 자치통감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정도 전력으로는 방어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공격은 취할 수 없었다. 거기다 상술하였듯 방관이 10월에 다시 한번 병력의 상당수를 상하게 하는 뻘짓까지 있었다. 이에 당숙종은 당 외부의 이민족들에게 눈을 돌린다. 우선 돌궐 제2제국의 멸망 이후 각 지역에 사민시켰던 돌궐을 비롯한 이민족들에게서도 병사들을 징발하도록 했다. 이는 당숙종 즉위 이전인 756년 7월부터 이미 시행되었는데, 주필, 팽원요를 하서절도사, 농우절도사로 임명해 보내면서 그 지역의 돌궐 기미주들의 [[도호]]였던 사결진명을 같이 파견, 병력을 징집하도록 하였으며, 756년 9월 빈왕 이수례의 아들 이승채를 돈황왕으로 삼아 당의 통제를 받던 발한나([[중앙아시아]] 나망간)의 병사들을 징발하고, 서역에서 성곽을 가진 국가에 일일이 유세를 가서 후한 포상을 약속하고 병사들을 안서4진 병사들과 함께 당에 들어와 원조하도록 청한다. 이민족 군대를 모음에 있어 특히 공을 들인 것은 회흘 즉 [[위구르 제국]]이었는데, 돈황왕 이승채가 복고회은과 함께 유세하자 회흘 측은 그를 [[공주]]와 결혼시켜가며 후히 대접하고, 아울러 많은 군사를 보낼 것을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회흘군을 청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대가를 지불한 것은 훗날의 큰 화근이 되었다.''' 회흘이 돌궐을 대체하긴 했으나 그 세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은 아니었고, 아직 [[키르기즈]]와 [[카를룩]]과 같은 적대세력들이 남아 있었다. '[[분할통치|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만고의 진리를 생각하면, 그리고 돌궐 제2제국과 상대하면서 당 자신이 겪었던 고생을 생각하면 돌궐과 같은 강대한 통일 [[유목민족]] 제국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은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당숙종은 회흘에게서 병력을 지원받는 대가로 막대한 자금을 제공해 준 것은 물론 공주와의 결혼까지 지원해주어 회홀이 [[유목제국]]으로써 북방 초원지대를 통일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제공해버렸다. 회흘은 이러한 호기를 놓치지 않았고, 이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위구르 제국을 성립시키며 당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사실 회흘에게 이만큼 지원을 퍼주었더라도 당과 대등해지기까지는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으니 당이 이 반란을 안녹산의 난에서 끝냈다면 회흘이 지나치게 커지기 전에 [[이이제이]] 등의 방책으로 제어를 시도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사명의 난]]으로 반란이 더 길어져 회흘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사명을 섣부르게 건드린 것이나 [[상주]]에서 9명의 절도사들을 지휘할 [[원수(계급)|원수]]를 임명하지 않아 결국 패하게 만든 것도 결국 당숙종에게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일이니만큼 더욱 아쉬운 일.] 이 시점의 당군은 외부의 병력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체 병력 또한 계속 증강하였다. 이로인해 '요새의 정병들은 모두 뽑혀 역적들을 토벌하는 데 들어갔고, 오직 남아있는 노약자가 변방을 지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당숙종은 누가 천하병마원수가 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 보여준 군재로만 따진다면 건녕왕 이담 역시 자격이 충분하였으나, 건녕왕 이담이 계속해서 전공을 세운다면 [[적장자]]인 광평왕 이숙([[당대종]])의 위치가 흔들리기 때문. 이 문제는 757년 1월, 건녕왕 이담을 동쪽으로 나아가 범양을 공략하게 할 때에 다시 불거졌고, 이에 심기가 편찮았던 당숙종은 이담과 사이가 영 좋지 않았던 환관 [[이보국]]과 황후 장량제가 옆에서 참소하자 그만 '''[[존속살인|건녕왕 이담에게 죽음을 내렸다.]]''' --이런 데서 부전자전-- 영무까지 도주할 때에 건녕왕 이담이 직접 창을 들고 당숙종을 호위해서 간신히 몸을 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비정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후에 당숙종은 이필에게 이담이 광평왕 이숙의 위치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이필은 '''[[팩트폭력|두 형제는 사이가 좋았고 태자가 건녕왕 이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했다]]'''면서 당숙종을 ~~뻘쭘~~ 무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는 숙종의 손자인 [[당덕종]]과 이필이 대화할 때에 당덕종이 '''당숙종의 성격이 급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함으로써 --[[확인사살]]-- 공식입증까지 되었다.[* 황실에서도 유력한 인물로 부상한 데다 확실히 군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담이 살아있었다면 당대종~당덕종~당헌종 시기 혼란했던 당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많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이때에 [[제오기]]를 기용, '''[[소금]] 전매법'''을 실시해 재정을 보충한다. 당의 소금 전매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보통 소금 전매는 [[민란]]을 가져오는 일등공신이라는 것을 볼 때 이때부터 당은 군자금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비상을 건 것으로 보인다. 757년 1월, 당숙종은 안서, 북정, 발한나, [[대식국|대식]] 등 여러나라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장안에 상당히 근접한 지역인 봉상(鳳翔, [[섬서성]] 봉상현)으로 행재소를 옮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